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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날  


                  

               수필부문 우수상

                                                                                                                                              김영호




헛헛한 시간을 때울 때는 종종 발걸음을 장터로 향한다.

정영신 작가의 '한국의 장터'라는 책은 어머니가 만든 시루떡 두께만큼이나 두툼하다.

책장 속의 방방곡곡 장터들을 글 속에서 느끼다 말고, 추억의 골짜기로 빠져 들여다본다.

사 십여 년 전 제주도에 오일장 중 하나가 신창 장이었다. 바닷가 원담 너머 널찍이 펼쳐진 시골장이다. 꽃 피는 봄이면 시장 옆 승암이네 누렁이 소가 음매하며 기지개를 켜는 소리만큼이나 장은 활기가 넘쳤다.

새 학기라 첫 학교 입학하는 아이들 옷도 장만해 줘야 하는 동내 어머니들은 장날이면, 산간 지방에서부터 해안 동네 사람들까지 모두 모이다시피 해서 북새통을 이룬다.

장터에 오면 이이 옷을 하나 사 주고 푼 게 어머니 마음이다. 장에 온 아이는 운동화나 옷가지에 눈이 갈 만도 한데, 정신은 온통 시장통 안 뻥튀기 아저씨에 '뻥이요'하는 소리에 귀를 막으며 구경 삼매경에 빠져 있다. 그러는 아이를 잡아채며 어머니는 운동화 가게로 간다. 우리 집처럼 한꺼번에 내 켤레나 사려고 하면 어머니는 허리춤부터 살핀다. 전대를 보면서 운동화 사고 나면 다른 시장 볼거리들을 살 수 있을지, 어머니가 미리부터 계산하는 모양이다.

이런 일 때문에 어머니는 가끔씩 시장에라도 올라치면 농사지은 보리쌀이라도 한 짐 가득 갖고 오든, 아니면 좁쌀이라도 너 됫박 갖고 와서는 수완 좋게 파셨다. 그래야지만 갖고 온 현금과 장사해서 번 돈을 합쳐 그날 살 것들을 얼추 사고 가신다. 그러고 나서 들린 옷 가게에서는 옷이라도 하나 살라 치면 흥정부터 하며 입씨름을 한다. 여러 가지 장사를 젊은 때부터 다 해 본 어머니는 흥정하는데도, 내가 보기에는 고수임에 틀림이 없다. 시장에서 거의 볼 일을 다 보고 나서 마지막으로 생선 가게에 가서는 고등어라도 몇 마리 사시곤 하였다.

여름이 가까워질 장마철이 막 끝나고 나서 강 의원 너머 논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폭포수가 되어 장관을 이룬다. 물줄기는 장터를 지나 바닷가로 곧바로 향한다.

우리들은 하굣길에 요즘 워터파크 못지않은 동네 아이 둘에 놀이터가 된다. 검정 고무신을 뒤집어 뱃놀이하며 논다. 집에 갈 때는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주께 새 집 다오~" 하며 서너 번 두드리다 보면 어느새 다 말라 있다.

즐거운 여름방학이면 어김없이 학년 구분 없이 그 시절에는 방학 숙제가 있었다. 달리 미술 학원이라고 다녀 본 적 없는 아이들에게 만들기 숙제는 어려운 문제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그 고민도 장터 도로 밑에 파묻혀 있던 찰흙 하나만 있으면 한나절이면 해결됐다. 서너 이서 모여 흙을 파서는 탱크도 만들고 배도 만들며 우리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그렇게 여름날에 오후를 보내곤 했다. 장터는 고구마 수확할 때 즈음이면 고구마 수매 현장이 되기도 한다. 기분 좋게 일등급이라도 받는 날이면 삼춘1)들에 막걸리 판이 즉석에서 열리기도 하며 농사에 시름을 내려놓기도 하고, 생각만치 등급을 못 받은 집은 밀린 빚 갚을 생각에 푸념하며 한 잔 술에 또 시름을 잊는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목돈이 생기면 생필품들을 사러 오일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에 가서 낮과 호미도 구입하고 햇빛을 가려줄 밀짚모자도 사고 나서, 일할 때 입는 일바지도 산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찬거리 사러 닭 울음소리가 나는 난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곳에 있는 강아지들 중 주인과 이별하는 것을 아는 녀석인지는 몰라도 가끔은 눈물이 그렁그렁 한 모습들의 강아지들도 더러 눈에 띈다. 강아지 옆에는 팔린 염소가 대장이랍시고 뿔을 들이 밀면, 아이는 혼비백산해서는 날다람쥐가 된다. 난장 한편에서 오리도 꿱꿱-거리며 반기는데 그 소리에 아이도 꿱꿱-하며 장단을 맞춘다.

계란과 토종닭을 갖고 나온 할아버지는 "지네 먹은 닭 사당 한번 잡앙 먹어 봅써"하며 어머니께 부추기는 말에, 어머니는 큰맘 먹고 닭을 사고 오신다. 닭 사고 온 저녁은 아버지가 털을 뽑고 나는 멍석을 깔며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빛들을 보며 저녁상 준비를 거든다.

저녁상이 나오면 푹 삶아져 나온 닭 다리며 살을 발라 내게 주시던 아버지다. 대 식구인 우리 집에 닭 먹는 날이면 아버지는 닭갈비에 목뼈가 제일 맛이 있다며, 술잔을 기울이며 깨작거리듯이 먹곤 하였다. 어른이 되어 한참이나 지나서 나도 아이들과 같이 백숙을 먹는 날이면, 아버지가 왜 맛도 없는 그 부위들만 먹었는지 새삼 깨닫고는 목이 멘다.

눈이 오면 장터는 나그네들이 발길들이 다소 뜸한 게 사실이다. 그래도 그런 장터에는 우리들을 반겨주는 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붕어빵 장수 아주머니다. 하굣길에 우리는 장날이면 동네 소꿉친구들과 어김없이 붕어빵 가게로 간다. 돈이 거의 없는 우리들은 붕어빵 하나씩을 사서 나눠 먹으면서도 한참이나 그곳에서 아주머니와 수다를 떨며 장이 파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면 인심 좋은 아주머니는 우리들의 속내를 알아채고는 팔다 남은 붕어빵을 돈도 안 받고 남은 걸 다 먹으라고 주신다. 그러면 한 개는 먹고 남은 것은 동생 주려고 종이에 싸서는 개선장군이 된 것처럼 집으로 향한다. 집 모퉁이에서 놀던 동생을 부르며 터져버린 붕어빵을 주면, 동생은 한없이 해 말게 웃으며 형이 최고라며 먹기 바쁘다. 그 당시 신창 장 난장에는 생필품을 죄다 갖다 놓아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이가 많던 시절이라 참 빚 장수도 있었고, 좀 없애는 약이라고 알고 있었던 나프탈렌과 쥐약도 영락 없이 만물상 한구석을 차지했었다. 세월이 변화와 아울러 벽촌이 돼버린 내 고향 신창에는 이제는 오일장이 서지 않는다. 그 흔적 너머에는 비구름만이 오다가다 그 기억에 빗줄기들을 뿌려준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는 제주시 오일장으로 발길질한다. 제주시 오일장에는 수많은 난장이 펼쳐지고, 그 속에서 사람 사는 내음이 진하게 베어 나서 그 맛을 느끼려 자주 가는가 싶다.

계절마다 바뀌는 꽃과 나무를 파는 아주머니에 얼굴들에는 늘 싱그러움으로 넘쳐난다. 제주에만 파는 갈중이2) 옷들도 시장 귀퉁이를 장식하며 관광 온 여행객들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저만치서는 트로트 음반을 파는 아저씨의 목청만큼이나 구성진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그곳을 지나 가노라면 과일 가게들이다. 옛날에는 참외. 수박. 물외나 고작 토마토가 전부였던 좌판에는 어느새 물 건너온 서양 과일들이 우리 토종 과일들을 밀어내고 앞자리에 고개를 내밀 때는 서글픔마저 느낀다. 그곳을 지나 생선가게로 향한다. 생선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은 장터에 핵심이다. 이곳저곳에서 부른다. 반백이 넘은 나를 보고 총각 하며 '물 좋은 생선 여기 다 이서~'하는 아주머니에 손짓에 삼치도 사고 고등어도 넉넉히 사서는 양가 어머니께 보내려 마음 씀 해 본다. 얼추 시장 한 바퀴 돌고 나면 내가 좋아하는 도넛 가게에서 꽈배기 도넛도 사서 아이들 손에 주고 나면, 배꼽시계도 깜빡거린다. 국밥집 할미 집으로 우리 내외는 어느새 향한다. 고기 국수나 국밥 한 사발을 시켜놓고 막걸리 한 사발을 걸치고 나면 저녁놀이 벌겋게 물들어 온다.



※ 1) 삼춘 : 제주도 사람들은 동네 어른들은 다 삼춘이라 부른다

   2) 갈중이 : 여름에 입는 옷으로 감으로 물들인 일 옷





<당선소감문>



후비진 삶의 한 길모퉁이를 걷다가 우연히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습니다.

저 푸르렀던 잎새들이 언젠가는 떨어져 한 줌에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왠지모를 허망함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비관보다는 삶의 버팀목이 되는 디딤돌을 하나하나 놔가는 일이, 저에게는 글 쓰는 일이지 않나 싶습니다.

십여 년여 전 불의에 사고로 암흑 같던 고뇌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저를 위로하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책 읽기와 글 쓰는 작업에 시간들 뿐이었습니다. 그때 써 둔 수필 중 하나가 '장날'이라는 이번에 당선된 수필입니다.

등단한 지가 강산이 변했지만 삶의 버겁다 보니 여태 초도작 한 권 못 내고 원고만 수북이 쌓여갑니다. 삶의 바쁘다는 핑계로 잠시 주춤했던 글쓰기 작업도 이번 수상을 계기로 다시 시작해 보려 합니다. 비록 부족한 글심 밭이지만, 독자들에게 긴 여운 하나 남기는 그런 작가로 거듭나가겠습니다. 금번 심사에 노고를 아끼지 않는 위원! 작가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 기쁨을 문학 시선을 아끼고 사랑하는 회원님. 작가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끝으로 오랫 세월 힘든 시간 속에서도 버팀목이 되어 준 아내에게 이 상에 영광을 함께 하렵니다.





<심사평>


이번 공모전에 가장 치열했던 심사부문은 수필부문이었다.최우수상1편.우수상2편 모두 대상으로 선정해도 무리없는 작품이었다.그 만큼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얘기다. 작가의 작품

'장 날'은 산문의 정석이다 라고 할 정도로 치밀하면서도 자연스럽고 객관화된 전개에 독자들도 읽는 순간 느낄 수 있는 작품임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음을 느낄 것이다.

당선을 축하한다. 



                                                                        김정권

                                                                        정성수

                                                                        박정용









<약력>


* 1990년 제주대학교 졸업

* 2010년 제주 문인협회 신인. 문학상 가쟉수상

* 2011년 아띠문학수필 부단장 역임

* 캘리그라피 지도사 1급

* 현 제주대학교 해군 ROTC 동우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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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6-24 2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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